< 배움의 가장자리에 서서 >
노인복지학과 선·후배님 반갑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유아시절 6·25 동란을 겪으며 헐벗고 굶주림 속에 성장하였고, 청소년기에는 대부분 산속에서 생활하며 도라지(길경), 딱주(잔대), 칡뿌리(갈근)등으로 배를 채우며 생활하였습니다.
교육의 의무인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진학이라는 단어는 꿈도 꾸지 못한 채 농사일에만 매달렸습니다.
1968년 예비군 창설과 함께 제1기 보충병에 편입되어 집에서 도시락을 들고 3주간 방위병 교육을 마쳤습니다. 일반 예비군에 편입되어 훈련을 받던 중, 이번에는 현역에 입대하라는 통지서를 받았고, 1970년 6월말 제2훈련소와 대구 국군 군의학교를 거쳐 곧바로 월남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백마 사단 의무중대에서 그 좋은 미제의 약이 수두룩한데도 학력문제로 스스로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래도 내 손으로 직접 할 수 있는 것은 2달러짜리 고래 사냥이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귀국 후 절반도 더 남은 군 생활을 마치고 만기 전역하였습니다. 사회생활의 시작은 일일 노무자로 힘든 노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1983년 중동으로 인력 수출이 한창일 때 83년~85년 26개월의 근무로 달러 수입의 맛에 사람 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배우지 않고는 사회생활도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고 94년 정월 초 초등 모교를 찾게 되었습니다. 주경야독으로 낮에는 망치, 밤에는 EBS 교육방송에 매달려 처음으로 중졸과정 검정고시에 응시하여 한 달 후 합격이라는 기쁜 소식을 받았습니다. 이 후 고등교육의 배움은 낮에 고단한 작업의 여파로 힘든 배움이 되었습니다.
94년 8월 고졸 자격 검정고시에 도전하였으나 보기 좋게 떨어졌습니다. 더욱 열심히 교육방송에 매달린 결과 1995년 5월 5일 시행한 대입자격 검정고시에서 평균 75점의 성적으로 합격했습니다. 이때 제 나이가 47세였습니다.
성장하는 아이들 때문에 내 욕심만 채울 수가 없어 회사 생활에 전념였으나, 얼마 후 년식에 의해 퇴직과 함께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고엽제 사무장을 시작으로 상이군경회 지도위원, 재향군인회 동래, 연제구 수석 부회장직을 맡아 세계 최고·최대 안보의 역군인 재향군인의 화합과 단결,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지역 경로당 회장직을 맡아 2019년 부산 노인 연합회에서 제27기 노인 지도자 대학 교육을 받던 중 최유미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최유미 교수님의 ‘자원봉사 관리’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부산디지털대학교의 자랑에 현혹되어 코로나 학번인 20학번으로 노인복지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최유미 교수님 덕분에 강의를 잘 마무리하고 총장님으로부터 ‘자원봉사 관리사’ 수료증을 받았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게 하고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교수님과 전생에 인연이 있었을까?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 수업이고 젊은 사람들의 광장인 대학이라 걱정되었습니다. 내가 오롯이 설 자리가 있을까? 그러나 인내와 노력의 산실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매일 조용한 새벽에 기상하여 매 주차의 강의 수강과 반복 학습을 통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젊은 학우들의 격려에 많은 도움도 받았습니다. 늘어나는 수명 30여년, 초고령화 시대로 도래하는 시점에 많은 노인들을 위해서 노인복지학과를 택한 것이 정말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7학년 3반이라는 숫자에 입학하여 벌써 4년째, 이번 학기를 끝으로 졸업과 함께 이웃 어르신들께 배운 것을 되돌려 갚아야겠습니다.
노인복지학과 학우님들, 이제는 노인 시대인 만큼 노인을 위해, 노인을 위한, 뒷바라지를 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여 배우고 최선을 다하여 함께 걸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또 한 어르신들의 저물어 가는 황혼길에 나의 작은 손길일지라도, 푸르른 소나무처럼 향긋한 솔 내음의 향기가 마을에 퍼지리라 생각하며 이번 학기로 졸업 후, 노인복지학과 후배님들을 위해 ‘후배 사랑’에 동참할 것을 약속해봅니다.
2023. 09. 08.
부산디지털대학교 노인복지학과 대표 4학년 박성완